《더 피아트 스탠다드》를 리뷰하면서 화폐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처음 접했었다. 이번 책은 그 비판을 한 단계 더 구체적인 질문으로 좁힌다. “왜 부자는 점점 더 부자가 되고, 나머지는 제자리걸음인가.” 두 저자가 내놓는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범인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국가가 독점한 화폐 시스템이라는 거다. “부자가 되지 못한 것은 당신 탓이 아니다”라는 도발적인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출간 이후 스페인 아마존 경제 분야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며 마크 파버를 비롯한 세계적 투자자들의 극찬을 받았다.
어떤 사람이고, 어떤 책이냐
저자 필립 바구스는 스페인 마드리드 레이 후안 카를로스 대학 교수로, 오스트리아 학파의 경제 이론과 디플레이션을 전문으로 연구해왔다. 공저자 안드레아스 마르크바르트는 독일 루트비히 폰 미제스 연구소 대표로, 15년간 은행에서 일한 뒤 독립해 오스트리아 국민경제학파 이론을 바탕으로 고객들의 자산 설계를 돕고 있는 금융 멘토다. 두 사람 모두 케인즈 경제학의 정부 개입주의에 반대하고, 시장의 자율적 조정을 강조하는 오스트리아 학파의 계보를 잇는 인물들이다.
책은 들어가는 글 ‘더 이상 돈에 이용당하지 말라’로 시작해, 돈의 탄생부터 빚 권하는 사회에 이르기까지 9개 장에 걸쳐 국가 주도 화폐 시스템의 작동 원리를 추적한다. 화폐의 역사,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의 실체, 은행의 신용창조 특권, 그리고 빈부격차가 어떻게 이 시스템 안에서 구조적으로 발생하는지를 차례로 다룬다.
좋은 화폐와 나쁜 화폐
책의 출발점은 화폐가 어떻게 시작됐는지를 되짚는 데서 시작한다. 역사적으로 다양한 물건이 교환 수단으로 쓰였지만, 결국 희소성과 안정성을 가진 금과 은이 화폐로 자리 잡았다는 거다. 저자들은 이런 화폐를 ‘좋은 화폐’로, 정부의 개입으로 등장한 불태환 종이화폐를 ‘나쁜 화폐’로 구분한다. 좋은 화폐는 누구도 함부로 공급량을 늘릴 수 없어 가치가 안정적인 반면, 나쁜 화폐는 권력을 가진 소수가 마음대로 늘릴 수 있다는 게 핵심 차이다.
이 구분이 사이페딘 아모스가 《더 피아트 스탠다드》에서 다뤘던 경화와 연화의 대비와 거의 동일한 논리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게 흥미로웠다. 화폐 시스템을 비판하는 오스트리아 학파 계열의 저자들이 결국 비슷한 결론에 도달한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하는 느낌이었다.
돈을 찍어내는 은행의 특권
책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다루는 게 ‘돈이 계속 늘어나는 이유’다. 저자들은 정부와 중앙은행이 통화 공급을 독점하고 있고, 시중 은행은 이를 바탕으로 신용을 무한히 확장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린다고 짚는다. 이 과정에서 새로 발행된 돈이 가장 먼저 도달하는 사람들, 즉 정부와 금융권에 가까운 사람들이 가장 먼저 그 혜택을 누리게 된다는 거다.
이 논리는 이 블로그에서 다뤘던 칸틸론 효과와 정확히 같은 구조였다. 새로 풀린 돈이 모두에게 동시에 똑같이 퍼지는 게 아니라, 돈을 먼저 받는 쪽과 나중에 받는 쪽 사이에 구조적인 격차가 생긴다는 거다. 저자들은 이걸 ‘아래에서 위로 가는 부의 재분배’라고 표현하는데, 평범한 임금 노동자들의 부가 결국 자산을 먼저 손에 쥔 사람들에게로 흘러간다는 주장이었다.
인플레이션은 누가 벌고 누가 잃는가
책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투자와 맞닿은 부분이 인플레이션을 다루는 챕터였다. 저자들은 인플레이션이 단순한 물가 상승이 아니라, 화폐를 먼저 손에 쥔 사람과 나중에 손에 쥔 사람 사이의 부의 이전이라고 정의한다. 봉급생활자처럼 고정된 소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물가가 오른 뒤에야 그 영향을 체감하지만, 자산을 보유한 사람들은 이미 그 전에 화폐 가치 하락의 혜택을 누렸다는 거다.
이 부분에서 짚는 ‘부와 빈곤의 알고리즘’이라는 표현이 인상적이었다. 저자들은 이게 우연이나 개인의 노력 부족이 아니라, 화폐 시스템 자체에 내장된 구조적 결과라고 본다. 부자가 되지 못한 게 당신 탓이 아니라는 책의 도입부 메시지가, 바로 이 지점에서 논리적으로 완성되는 셈이다.
가장 인상 깊었던 통찰
책에서 가장 오래 곱씹게 된 메시지는, 복지국가가 좋은 것이라는 통념에 대한 반박이었다. 저자들은 정부의 복지 지출이 화폐 발행 확대와 맞물려 있고, 결국 그 비용이 인플레이션이라는 형태로 다시 평범한 사람들에게 전가된다고 짚는다. 단기적으로는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이는 정책이, 장기적으로는 같은 시스템을 더 공고하게 만든다는 이 역설적인 시각이 가장 도발적으로 다가왔다.
비판적으로 봐야 할 지점들
다만 이 책은 분명히 한쪽 입장에 선 사상서라는 점을 감안하고 읽어야 한다. 저자들이 속한 오스트리아 학파는 정부 개입을 최소화하고 시장의 자율 조정을 신뢰하는 입장인데, 이는 케인즈 경제학을 비롯한 다른 주류 경제학파와 정면으로 대립하는 시각이다. 한 독자평에서도 짚었듯, 이 책의 주장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함께 가져야 하며, 반대편인 케인즈 경제학 진영의 논리도 균형 있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정부의 화폐 정책과 복지 지출을 빈부격차의 핵심 원인으로 단순화하는 부분은, 빈부격차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요인들(세습 자본, 교육 격차, 기술 변화, 노동시장 구조 등)을 상대적으로 가볍게 다룬다는 인상을 준다. 화폐 시스템이라는 하나의 렌즈로 모든 경제 현상을 설명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에, 이 책을 빈부격차에 대한 완결된 답이라기보다는 여러 관점 중 하나로 받아들이는 게 균형 잡힌 독서가 될 것 같다.
누구한테 추천하나
- 인플레이션과 빈부격차의 관계를 화폐 시스템이라는 구조적 관점에서 깊이 파고들고 싶은 사람한테 추천한다.
- 이 블로그에서 다뤘던 화폐 비판서들(《더 피아트 스탠다드》, 《달러는 왜 비트코인을 싫어하는가》)을 흥미롭게 읽었다면, 같은 계보의 또 다른 시각으로 흥미롭게 읽힐 거다.
- 다만 균형 잡힌 경제학적 시각을 원한다면, 이 책의 주장만으로 결론을 내리지 말고 케인즈 경제학 등 반대 입장의 논의도 함께 찾아보길 권한다.
총평
별점은 5점 만점에 3.5점. 빈부격차를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 문제로 단순화하지 않고, 화폐 시스템이라는 구조적 차원에서 짚어낸 시도 자체는 신선했다. 칸틸론 효과와 비슷한 논리로 부의 재분배 메커니즘을 풀어내는 방식도 흥미로웠다.
다만 모든 경제 문제의 원인을 국가의 화폐 독점 하나로 환원하려는 시도는, 한쪽 입장에서는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리지만 동시에 지나친 단순화라는 인상도 지우기 어렵다. 화폐 시스템이라는 새로운 렌즈를 얻는다는 점에서는 가치 있는 책이지만, 이 책 하나로 빈부격차 문제 전체를 이해했다고 단정하기보다는 여러 시각 중 하나로 받아들이는 게 맞을 것 같다.
이 글은 개인적인 독서 후기이며, 투자 조언이 아닙니다. 투자 판단은 본인 책임 하에 신중하게 결정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