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런 버핏의 주주 서한을 리뷰하면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그렇게 압도적인 투자 실적을 낸 버핏도 의견을 구하는 사람이 있을까. 답은 명확하다. 찰리 멍거다. 버크셔 해서웨이 부회장이자 버핏의 평생 파트너였던 그가 남긴 강연과 사상을 모은 책이 바로 이 《가난한 찰리의 연감》이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이 책은 투자서라기보다, “어떻게 하면 덜 멍청하게 생각할 수 있는가”를 파고드는 사고법 교과서에 가까웠다.
어떤 사람이고, 어떤 책이냐
찰리 멍거는 워런 버핏이 평생 가장 신뢰한 파트너였다. 책 제목부터가 의미심장한데, 18세기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인 벤저민 프랭클린이 쓴 《가난한 리처드의 연감》에서 따온 거다. 프랭클린이 그 책에서 “사람을 설득하려면 이성이 아니라 이익(이기심)에 호소하라”는 식의 처세훈을 남겼던 것처럼, 멍거 역시 평생 인간 심리와 의사결정의 본질을 파고들었던 인물이다.
이 책은 멍거가 대학 강연이나 버크셔 해서웨이 주주총회에서 발표한 주요 연설문을 중심으로, 측근들이 작성한 에세이를 함께 엮은 구성이다. 5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과 다소 산만하게 느껴질 수 있는 구성에도 불구하고, 투자자뿐 아니라 기업 리더, 사고력을 키우고 싶은 독자들 사이에서 일종의 컬트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격자틀 모형 — 멍거 사고법의 핵심 틀
이 책에서 가장 유명하고 자주 인용되는 개념이 ‘격자틀 모형(Latticework of Mental Models)’이다. 멍거는 한 가지 학문이나 한 가지 이론만으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가장 위험하다고 본다. 그가 남긴 말 중에 이런 게 있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머릿속에 정신 모델이 격자처럼 촘촘히 얽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스템을 통해 모든 것이 점진적으로 서로 맞물려 인지 능력을 향상시킵니다.”
쉽게 풀면 이렇다. 망치를 든 사람에게는 모든 문제가 못으로 보인다는 말처럼, 경제학만 아는 사람은 모든 문제를 경제학으로만 풀려고 한다. 멍거는 경제학, 심리학, 물리학, 생물학, 수학 등 여러 학문에서 검증된 핵심 개념들을 끌어와 격자처럼 엮어두면, 어떤 문제가 닥쳐도 여러 각도에서 동시에 바라볼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 다학문적 접근이야말로 멍거를 단순한 투자자가 아니라 ‘사고하는 방법 자체를 가르치는 사람’으로 만든 핵심 무기다.
오판의 심리학 — 인간이 어리석은 판단을 내리는 25가지 이유
이 책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챕터가 ‘오판의 심리학(The Psychology of Human Misjudgement)’이다. 멍거가 1995년 하버드 법학대학원에서 강연한 내용을 살을 붙여 정리한 건데, 사람이 비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게 되는 심리적 경향 25가지를 낱낱이 해부한다. 몇 가지만 짚어보면 이렇다.
보상과 처벌 경향. 인센티브가 사람의 행동을 얼마나 강력하게 좌우하는지 보여주는 사례로, 멍거는 페덱스의 야간 환적 작업 이야기를 든다. 시간제로 급여를 줄 때는 업무가 좀처럼 끝나지 않았는데, 업무 단위로 급여를 바꾸고 끝나면 바로 퇴근하게 하자 효율이 크게 개선됐다는 거다. 반대 사례로 제록스 얘기도 나오는데, 영업사원들이 최신 복사기보다 구형 제품을 더 많이 팔길래 알아보니, 구형 제품 판매 시 받는 인센티브가 더 컸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인센티브 구조 하나가 사람의 행동을 이렇게까지 왜곡할 수 있다는 게 섬뜩하면서도 명쾌했다.
호기심 경향. 25가지 경향 중 멍거가 거의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항목이다. 포유류는 본래 호기심이 많고, 그중에서도 영장류의 호기심이 특히 강한데, 이 호기심을 잃지 않는 것이 오판을 줄이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거다.
현실 부정 경향. 받아들이기엔 너무 고통스러운 현실을 아예 부정해버리는 심리다. 투자에서 손실 중인 종목을 계속 들고 있으면서 “곧 회복될 거야”라고 되뇌는 행동이 전형적인 사례다.
이 외에도 의심 회피, 불일치 회피, 시기·질투, 상호성 경향 등 사람을 오판으로 이끄는 다양한 경향들을 멍거 특유의 구체적인 사례와 함께 하나하나 짚어준다. 읽다 보면 내가 평소에 내렸던 의사결정 중 상당수가 이 25가지 경향 중 하나에 걸려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롤라팔루자 효과 — 여러 경향이 겹칠 때 벌어지는 일
이 책에서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개념이 ‘롤라팔루자 효과(Lollapalooza Effect)’다. 앞서 말한 25가지 심리적 경향이 한 번에 하나씩만 작동하는 게 아니라, 여러 개가 동시에 겹치면서 상상 이상으로 강력한 시너지를 낸다는 거다. 사이비 종교 집단이 사람을 끌어들이는 방식이나, 거대한 금융 버블이 형성되는 과정을 보면 보상 경향, 사회적 증거 경향, 권위 순응 경향 같은 여러 심리적 경향이 동시에 작동하면서 개인이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압력을 만들어낸다. 이게 멍거가 말하는 다학문적 접근과도 맞닿아 있다. 현상 하나를 단일 원인으로 설명하려 들면 이런 복합적인 작용을 절대 이해할 수 없다는 거다.
가격이 잘못 매겨진 베팅을 찾아라
투자 철학 측면에서 멍거가 강조하는 핵심은 ‘가격이 잘못 매겨진 베팅(mispriced bet)’을 찾는 것이다. 이건 워런 버핏의 가치투자 철학과 본질적으로 같은 맥락인데, 멍거 특유의 표현으로 풀어내면 더 직관적으로 다가온다. 경마장에서 배당률이 잘못 매겨진 말을 찾듯, 시장이 한 기업의 진짜 가치를 잘못 평가하고 있는 순간을 찾아내고, 그 순간에만 베팅하라는 거다. 대신 그런 기회가 자주 오지 않으니, 확신이 없을 때는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인내심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능력보다 태도, 성공보다 준비
투자 얘기를 떠나서,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남았던 건 멍거의 인생관이었다. 그는 성공에 지름길은 없으며, 노력하고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통찰을 얻기를 바라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능력보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성공하려는 의지보다 준비하려는 의지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 메시지가 화려한 투자 비법을 기대했던 독자에게는 다소 평범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평생 합리적 사고를 추구해온 사람이 결국 도달한 결론이 “꾸준한 준비와 태도”라는 점이, 오히려 더 묵직하게 다가왔다.
다소 아쉬운 점
이 책은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강연록과 에세이를 모은 구성이다 보니 흐름이 매끄럽지 않고, 같은 주제가 여러 챕터에 걸쳐 반복되기도 한다. 5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도 가볍게 들고 다니며 읽을 책은 아니다. 또한 오판의 심리학 25가지를 비롯한 여러 개념들이 한 번에 너무 많이 쏟아지는 느낌이 있어서, 처음 읽을 때는 정리하면서 읽는 노력이 필요하다.
누구한테 추천하나
- 투자뿐 아니라 의사결정 방식 자체를 점검하고 싶은 사람한테 강력 추천한다. 이 책은 투자서보다 사고법 책에 가깝다.
- 본인이 평소에 왜 비합리적인 선택을 반복하는지 이해하고 싶은 사람한테도 유용하다. 오판의 심리학 챕터만 읽어도 값어치를 한다.
- 다만 가볍게 읽을 입문서를 찾는다면 이 책보다는 좀 더 압축된 책으로 시작하는 게 나을 수 있다. 이 책은 천천히, 여러 번 곱씹으며 읽어야 진가가 드러난다.
총평
별점은 5점 만점에 4.5점. 화려한 종목 추천이나 투자 공식은 없다. 대신 어떻게 생각해야 덜 멍청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지를 끈질기게 파고드는 책이다. 격자틀 모형과 오판의 심리학, 이 두 가지 개념만 제대로 흡수해도 평생 의사결정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워런 버핏이 평생 의지했던 단 한 사람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경험, 그 자체로 이 책은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
이 글은 개인적인 독서 후기이며, 투자 조언이 아닙니다. 투자 판단은 본인 책임 하에 신중하게 결정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