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스완》을 리뷰할 때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정작 그 책의 핵심 주제인 ‘불확실성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지한가’를, 학문적으로 가장 체계적으로 증명해낸 사람은 따로 있다는 거였다. 심리학자로는 최초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대니얼 카너먼이다. 실제로 카너먼은 이 책에서 본인의 견해가 나심 탈레브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직접 밝히기도 한다. 두 사람의 사고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쌓아온 통찰이라는 걸 알고 나니, 이 책을 더 늦지 않게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사람이고, 어떤 책이냐
저자 대니얼 카너먼은 심리학자로서는 최초로 2002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인물이다. 동료 심리학자 아모스 트버스키와 함께 1979년 ‘전망 이론’을 발표하며 행동경제학이라는 분야 자체를 만들어냈다. 합리적 인간을 전제하는 전통경제학의 토대를, 두 심리학자가 실험을 통해 정면으로 흔들어놓은 셈이다. 이 책은 2011년 출간된 그의 첫 대중교양서로, 수십 년간 쌓아온 연구를 집대성한 결과물이다. 흥미롭게도 그동안 행동경제학 책들은 시중에 쏟아져 나왔지만, 정작 이 분야를 창시한 카너먼 본인의 책은 없었다는 점에서 출간 당시 더 큰 주목을 받았다.
책은 인간의 사고 체계를 두 개의 가상 주체로 나눠 설명하는 구성을 취한다. 6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에, 수십 년간의 실험과 사례가 빼곡히 담겨 있어 가볍게 훑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그럼에도 행동경제학과 인지심리학의 바이블로 불리며, 이후 나온 수많은 베스트셀러(《넛지》를 비롯해 인간의 비합리성을 다루는 거의 모든 책)가 이 책을 인용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시스템 1과 시스템 2 — 두 개의 자아
이 책의 핵심 프레임이 ‘시스템 1’과 ‘시스템 2’다. 시스템 1은 빠르고, 직관적이고, 노력이 거의 필요 없는 자동적인 사고방식이다. 2+2의 답을 떠올리거나, 갑자기 끼어드는 차를 피하는 순간적 판단이 여기 해당한다. 반면 시스템 2는 느리고, 의식적이고, 노력이 필요한 사고방식이다. 354×687 같은 계산이나 복잡한 의사결정이 여기 해당한다.
이 구분이 흥미로운 건, 우리가 스스로를 이성적인 존재라고 믿지만 실제로는 시스템 1이 대부분의 판단을 은밀하게 주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스템 2는 게으르다. 어지간하면 시스템 1이 내린 결론을 그대로 승인하고 넘어간다는 거다. 결국 우리가 ‘직관적으로 맞다’고 느끼는 판단 중 상당수가, 사실은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시스템 1의 성급한 결론일 수 있다는 거다.
대표성 휴리스틱과 가용성 휴리스틱 — 우리가 속는 방식
책에서 가장 실용적으로 다가왔던 부분이 다양한 휴리스틱(어림짐작)과 편향들이다. ‘대표성 휴리스틱’은 어떤 대상이 특정 범주의 전형적인 이미지와 얼마나 닮았는지로 확률을 판단하는 오류다. 책에 나온 유명한 예시처럼, ‘독립적이고 자기주장이 강한 여성’이라는 묘사만 듣고 그 사람이 단순한 은행원보다 ‘페미니스트 활동을 하는 은행원’일 확률이 더 높다고 착각하는 식이다. 통계적으로는 후자가 전자의 부분집합이라 확률이 더 낮은데도, 우리 뇌는 그 이미지의 그럴듯함에 속는다.
‘가용성 휴리스틱’도 인상 깊었다. 어떤 사건이 얼마나 쉽게 떠오르느냐로 그 빈도를 판단하는 오류인데, 책에서 소개된 실험이 흥미로웠다. 사람들에게 7글자 단어 중 ‘ing’로 끝나는 단어와 여섯 번째 철자가 ‘n’인 단어 중 어느 쪽이 더 많을지 물으면, 대부분 ‘ing’로 끝나는 단어가 더 많다고 답한다. 그런데 ‘ing’로 끝나는 단어는 반드시 여섯 번째 철자가 ‘n’이니, 논리적으로는 후자가 같거나 더 많아야 한다. 다만 ‘ing’ 단어가 머릿속에 훨씬 쉽게 떠오르기 때문에 착각이 생기는 거다.
손실 회피와 전망 이론 — 투자 심리의 뿌리
이 블로그의 주제와 가장 직접적으로 맞닿은 부분이 ‘전망 이론’이다. 카너먼과 트버스키는 사람들이 이익보다 손실에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걸 실험으로 증명했다. 그래서 이익이 걸린 상황에서는 안전한 선택을, 손실이 걸린 상황에서는 오히려 위험한 선택을 선호하는 비대칭적 패턴이 나타난다는 거다.
이 발견이 흥미로운 건, 같은 금액의 손실이 같은 금액의 이익보다 심리적으로 훨씬 더 아프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책에서는 ‘틀짜기(프레이밍)’라는 개념도 함께 다루는데, 똑같은 선택지라도 손실로 표현하느냐 비용으로 표현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결정이 달라진다고 한다. 투자에서 손절을 망설이고, 본전 생각에 매몰돼 더 나쁜 결정을 내리는 흔한 실수들이, 결국 이 손실 회피 성향에서 비롯된다는 걸 이론적으로 확인하는 느낌이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통찰
책에서 가장 오래 곱씹게 된 메시지는 ‘과신’에 대한 경고였다. 카너먼은 펀드매니저들의 연도별 운용 성과 간 상관관계가 거의 0에 가깝다는 걸 직접 증명했다. 어느 해 좋은 성적을 낸 매니저가 다음 해에도 좋은 성적을 낸다는 보장이 통계적으로 없다는 거다. 결국 단기간의 성공을 실력으로 착각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그리고 우리가 과거를 이해했다는 믿음이 미래도 예측할 수 있다는 착각으로 얼마나 쉽게 이어지는지를 짚는 대목이었다. 투자 경험이 길든 짧든, 이 한 가지 사실만 제대로 새겨도 자신의 판단을 좀 더 겸손하게 바라보게 될 것 같다.
비판적으로 봐야 할 지점들
다만 이 책을 읽을 때 감안해야 할 부분도 있다.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과 다소 매끄럽지 않은 번역 때문에, 술술 읽히는 책은 아니라는 평가가 많다. 비슷한 개념과 실험이 반복적으로 등장해서 중간에 흐름을 놓치기 쉽고, 통계와 확률 개념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이해가 더딜 수 있다.
또한 책에서 소개된 일부 심리학 실험은 이후 재현성 위기를 겪은 사회과학 분야의 흐름 속에서, 후속 연구로 결과가 약화되거나 논쟁이 제기된 사례도 있다. 카너먼 본인도 이후 저술에서 일부 연구의 한계를 인정한 바 있다. 책에 나온 모든 실험 결과를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이기보다, 인간 판단의 한계를 보여주는 풍부한 사례집으로 읽는 게 더 적절할 것 같다.
누구한테 추천하나
- 투자 결정에서 반복적으로 비슷한 실수를 저지르는 이유를 심리학적으로 이해하고 싶은 사람한테 추천한다.
- 《블랙 스완》을 읽고 인간이 불확실성을 얼마나 잘못 판단하는지에 흥미를 느꼈다면, 그 메커니즘을 학문적으로 더 깊이 파고드는 다음 단계로 이 책이 잘 어울린다.
- 다만 가볍게 핵심만 훑고 싶은 독자한테는 분량과 난이도가 상당히 부담스러울 수 있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읽어나갈 준비가 필요하다.
총평
별점은 5점 만점에 4.5점. 시스템 1과 시스템 2라는 단순한 프레임 하나만 제대로 흡수해도, 자신의 판단을 한 번 더 의심해보는 습관이 생긴다. 손실 회피, 과신, 휴리스틱 같은 개념들은 투자뿐 아니라 일상의 거의 모든 의사결정에 적용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활용 범위가 넓었다.
《블랙 스완》이 불확실성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지한지를 도발적으로 보여줬다면, 이 책은 그 무지가 정확히 어떤 심리적 메커니즘에서 비롯되는지를 학문적으로 증명해낸다. 두 책을 함께 읽으면, 왜 우리가 반복해서 같은 실수를 저지르는지에 대한 그림이 훨씬 입체적으로 그려질 것 같다.
이 글은 개인적인 독서 후기이며, 투자 조언이 아닙니다. 투자 판단은 본인 책임 하에 신중하게 결정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