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시대의 지정학과 비트코인》 리뷰 — 경제학이 아니라 지정학으로 읽는 비트코인

이 블로그에서 지금까지 읽은 비트코인 관련 책들은 전부 화폐 경제학자의 시각이었다. 사이페딘 아모스가 화폐사와 시간선호, 건전화폐 같은 개념으로 비트코인에 접근했다면, 이번 책은 완전히 다른 렌즈를 들이댄다. 국제정치와 지정학이다. 저자 오태민은 “미국이 비트코인을 막을 것이다”라는 통념에 정면으로 반박해온 국내 비트코인 연구자다. 이 책에서 그가 묻는 질문은 “미국이 비트코인을 왜 없애지 못하는가”가 아니라 “왜 없앨 마음이 없는가”다. 질문 자체가 이미 화폐 경제학서들과는 완전히 다른 결을 예고한다.

어떤 사람이고, 어떤 책이냐

저자 오태민은 연세대 경영학과 출신으로, 2014년 비트코인을 처음 접한 뒤 사토시 나카모토의 백서를 읽고 거의 석 달을 잠 못 이뤘다고 한다. 그때부터 비트코인을 인문학적, 철학적 관점에서 해석해온 인물로, 한양대학교 대학원에 국내 최초로 개설된 비트코인화폐철학과 겸임교수를 맡고 있다. 2017년부터 약 5년간 한경비즈니스에 ‘비트코인 A to Z’를 연재했고, EBS에서 공영방송 최초로 비트코인을 다룬 강연이 방영될 정도로, 국내에서 비트코인을 이해하려면 한 번은 거치게 되는 인물로 꼽힌다.

이 책은 전작 《비트코인, 그리고 달러의 지정학》의 전면 개정증보판이다. 트럼프가 2기 행정부 출범과 함께 비트코인을 전략자산으로 선언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자, 그 배경을 새롭게 분석해 내놓은 책이라고 보면 된다. 535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브레턴우즈 체제부터 아브라함 협정, 한미일 안보협력, 미국의 대중국 전략까지 20세기와 21세기의 굵직한 지정학적 사건들을 폭넓게 다룬다.

달러체제는 미국이 가장 관대했던 시스템이다

책의 출발점은 역설적이다. 저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만든 달러체제가, 사실은 미국이 패권국으로서 가장 관대했던 시기의 시스템이었다고 본다. 미국은 이 체제를 통해 동맹국들을 경제적으로 부축하고, 독립국가들의 주권을 존중하며 냉전을 관리해 결국 승리까지 거뒀다는 거다.

그런데 바로 그 관대함을 지탱하느라 미국의 힘 자체가 소진됐다는 게 저자의 핵심 진단이다. 기축통화국으로서 전 세계에 달러 유동성을 공급하는 역할을 떠안다 보니, 정작 미국 내부의 산업 기반과 사회 통합이 흔들렸다는 거다. 트럼피즘이라는 정치 현상과 트럼프의 귀환이 바로 이 소진된 힘의 결과물이라는 시각이 신선했다.

지정학적 인간이라는 출발점

저자가 책 초반에 깔아두는 인간관도 인상적이다. 인간은 무리 지어 행동하는 영역동물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해서, 국제 정치를 이상주의가 아니라 현실주의로 바라봐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다.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이 세계질서에서 도덕을 제거하고 국가 간 힘의 균형만 남겼다는 식의 서술이 대표적이다.

이 현실주의적 시각은 책 전체를 관통한다.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중국과의 화해와 결별 같은 굵직한 사건들을 도덕적 명분이 아니라 미국의 국익 계산으로 다시 읽어내는데, 이런 역사 재해석이 단순한 비트코인 책을 넘어 국제정치 교양서로서의 무게감을 더한다.

트럼프, 비트코인을 전략무기화하다

책의 핵심 주장은 트럼프가 비트코인을 전략자산으로 선언한 게 우발적인 정치 이벤트가 아니라는 거다. 저자는 이걸 달러체제의 강건성이 떨어진 상황에서, 미국이 비트코인을 새로운 형태의 패권 유지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전략적 선택으로 본다. 미국이 비트코인을 막지 않는 이유가, 비트코인이 오히려 약화된 달러체제를 보강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거다.

이 대목에서 저자가 짚는 ‘달러화 부족 이론’과 ‘미국 국채’ 챕터가 특히 흥미로웠다. 전 세계가 안전자산으로 미국 국채를 원하는 한, 미국은 막대한 부채를 발행해도 위기로 이어지지 않는 일종의 부채특권을 누린다는 거다. 그런데 이 구조 자체가 영원할 수 없는데, 비트코인이 이 구조의 압력을 완충해주는 새로운 변수로 등장했다는 시각이 책의 핵심 줄기다.

가장 인상 깊었던 문장

책에서 가장 오래 곱씹게 된 대목은 미국이라는 패권국의 모순적 위치를 짚은 부분이었다. 미국이 스스로 만든 규칙을 지키지 못하는 이유는, 미국 자신이 그 규칙을 수호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거다. 규칙을 지키게 하려면 참여자들의 동의나 설득만으로는 부족하고, 규칙을 어기는 이들을 응징할 힘이 있어야 비로소 규칙이 유지된다는 통찰이 인상적이었다. 패권국은 규칙의 수호자이면서 동시에 규칙에 가장 순응하기 어려운 존재라는 이 역설이, 달러체제와 비트코인의 관계를 이해하는 실마리로 작동했다.

비판적으로 봐야 할 지점들

다만 이 책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한계가 있다. 저자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비트코인 강세론자로, 본인이 직접 개발한 알트코인 사업을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이 때문에 일부 비트코인 강세론자들 사이에서조차 “궁극의 화폐는 비트코인뿐이라고 주장하면서 또 다른 알트코인으로 사익을 추구한다”는 비판을 받는다는 점은 독자가 알고 읽는 게 좋을 것 같다. 저자의 입장이 뚜렷한 만큼, 비트코인이 미국 패권 유지에 활용된다는 핵심 주장도 검증된 사실이라기보다는 저자 본인의 정교한 해석으로 받아들이는 게 맞다.

또한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방향이나 국제 정세는 출간 이후로도 계속 변하고 있는 영역이다. 책에서 다루는 특정 시점의 정책적 판단들이 이후 상황과 달라질 수 있다는 점도 감안하고 읽어야 한다.

누구한테 추천하나

  • 비트코인을 단순히 투자 자산이나 화폐 이론으로만 봐온 사람한테 추천한다. 국제정치와 패권 경쟁이라는 완전히 다른 틀로 비트코인을 보게 해준다.
  • 달러체제의 구조적 약점과 미국의 세계전략 변화에 관심 있는 사람한테도 흥미로운 독서가 될 거다. 비트코인 얘기를 빼고 봐도 지정학 교양서로 읽을 만하다.
  • 다만 저자의 비트코인 강세론적 입장을 감안하지 않고 객관적 분석서로만 받아들이고 싶은 사람한테는, 균형 잡힌 다른 시각도 함께 찾아보길 권한다.

총평

별점은 5점 만점에 4점. 화폐 경제학으로만 비트코인을 접했던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같은 주제를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다시 보는 경험을 하게 될 거다. 트럼프라는 한 인물의 변덕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80년간 쌓여온 패권 구조의 피로감이 지금의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큰 그림이 인상적이었다.

이 블로그에서 다뤘던 사이페딘 아모스의 책들이 “왜 비트코인이 좋은 화폐인가”를 다뤘다면, 이 책은 “왜 강대국이 비트코인을 굳이 막지 않는가”를 다룬다. 두 질문이 서로 보완적이라, 비트코인을 경제학적으로만 이해했던 독자라면 이 책으로 시야를 한 번 더 넓혀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 글은 개인적인 독서 후기이며, 투자 조언이 아닙니다. 투자 판단은 본인 책임 하에 신중하게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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